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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이야기 -

'물인데 얼음'… 새로운 고체 얼음의 발견

by KOREAN BANK CLERK 2023. 4. 9.

중간 밀도의 비정질 얼음을 만들기 위해 쇠구슬과 일반 얼음을 섞어 흔들었다.   photo    잘츠만 교수

 

고체이면서 액체인 물 같은 무질서한 분자 구조를 가진 얼음이 실험실에서 만들어져 과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바로 '중밀도 비정질 얼음'이다. 

밀도가 얼음보다 액체인 물에 더 가까운 새로운 유형의 이 얼음은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UCL )의 크리스토프 잘츠만( Christoph   Salzmann ) 화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발견했다. 

이들의 색다른 얼음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최근 발표되었다.


결정 상태의 얼음과 비정질 얼음


물은 온도 변화에 따라 기체·액체·고체의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액체인 물을 끓이면 기체인 수증기가 되고 얼리면 고체인 얼음이 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물

은 이렇게 그 상태를 자주 바꾸면서 지표와 지하, 대기 사이를 계속 순환한다.

빙하가 바닷물에 뜨는 것처럼, 물이 얼어 얼음이 되면 물에 뜬다. 

수소 원자 2개, 산소 원자 1개로 구성된 물 분자(H₂O)의 수소결합으로 인한 특성 중 가장 신기한 현상은 바로 고체 상태의 얼음이 액체 상태인 물에 뜨는 것이다. 

물보다 얼음의 밀도가 낮기 때문이다. 

물의 밀도는 단위 부피당 물의 무게를 말하는데 섭씨 4도일 때 가장 높다.

대부분의 물질은 액체가 고체로 바뀌면서 입자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부피가 줄어들고 밀도가 커진다. 

반면 물은 얼음으로 상태가 변할 때 수소결합이 강해지면서 분자들이 육각형 구조를 형성한다. 

이때 육각형 고리 안의 빈 공간이 생기며 부피가 증가해 밀도가 물보다 낮아진다. 

역으로 얼음이 녹을 때는 수소결합의 일부가 끊겨 빈 공간을 채우므로 물 분자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어 부피가 작아지고 밀도가 커진다.

이 같은 물의 특성으로 겨울에 물이 든 파이프가 얼어서 터지기도 하고, 소고기나 채소를 얼리면 세포막이 파괴되어 맛이 달라진다. 

또 바위틈의 물이 오랜 세월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에서 틈이 벌어져 바위가 부서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얼음이 하나의 형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얼음이 존재한다. 

얼음은 다수의 결정이 조밀하게 모여서 이뤄지는데, 결정 모양이 서로 다르게 밝혀진 얼음만 20종류나 된다. 

즉 모든 얼음 결정이 육각형이 아니라는 얘기다. 압력과 온도 등의 환경에 따라 한 면이 정사각형인 정육면체, 마름모 모양의 직육면체, 새장과 같은 다른 구조의 얼음 결정들이 만들어진다.

물이 얼어서 된 얼음은 분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 상태'를 이루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일정한 결정을 가진 정형화된 일반 얼음( Crystalline   Ice )과 달리, 분자가 마구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액체의 물처럼 배열이 일정치 않은 '비정질 얼음( Amorphous   Ice )'도 있다. 

물이 초저온 온도로 너무 빨리 냉각되면 분자가 정렬된 격자를 형성할 시간이 없어 무질서한 비정질 얼음이 생성된다. 

온도, 압력 등이 안정적인 지구상에서는 극히 드물지만 초저온 영역이 존재하는 우주 공간에서는 비정질 얼음이 비교적 쉽게 생성된다.

최근  UCL UCL과 케임브리지대 공동 연구팀이 발견한 새로운 형태의 얼음도 비정질 얼음의 하나다. 

지금까지 발견된 비정질 얼음은 두 종류다. 

물보다 밀도가 높은 고밀도 비정질 얼음( HDA·1.13g / ㎤)과 물보다 밀도가 낮은 저밀도 비정질 얼음( LDA·0.94g / ㎤)이다. 

이 둘 사이에 다른 중간 밀도의 얼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 상식이다.

UCL의 잘츠만 교수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정상적인 액체 상태의 물이 정확히 이 둘 사이의 밀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의문은 '액체 상태의 물은 밀도가 같은 다른 단계의 얼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으로 이어졌고, 이를 실제로 밝히기 위해 그는 새로운 얼음 만들기에 착수했다.

‘중밀도 비정질 얼음’ 분자 구조(왼쪽)는 육각형 격자 구조의 ‘일반 얼음’(오른쪽)과 다르다.물 분자가 빽빽한 액체 상태의 물과 비슷하다.   photo    케임브리지대



-200 ℃에서 강철 공과 얼음 섞어 흔들어


잘츠만 교수팀은 액화 질소를 이용해  -200 ℃까지 차갑게 만든 용기에 쇠구슬(스테인리스 스틸 볼)과 일반 결정질 얼음을 넣고 칵테일을 만들듯 지속적으로 흔들었다. 

산업계에서 딱딱한 물질을 분쇄하거나 혼합할 때 쓰는 '볼 밀링( ball   milling )'이라는 공정을 적용한 것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쇠구슬이 얼음에 부딪치는 기계적인 힘으로 얼음을 작게 깨뜨려 분자를 분해하는 것이다. 

얼음에 볼 밀링 기술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팀은 얼음을 미친 듯이 흔들어 결정 구조를 연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하얀 가루처럼 된 얼음 조각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특성의 얼음이 만들어졌다. 

겉모습은 일반 얼음과 비슷했지만 밀도는 액체 상태의 물과 거의 일치했다. 

물과 비슷한 밀도에서는 비정질 얼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정설을 깨고, 이전에 발견된 2종류의 '비정질 얼음' 중 중간에 해당하는 밀도의 얼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연구팀은 이것을 '중밀도 비정질 얼음( Medium   Density   Amorphous   Ice·MDA )'이라 명명했다.

MDA는 단순히 차가운 온도에서 볼 밀링이 얼음을 분쇄해 만든 것이다. 

따라서 목성의 위성인 가니메데와 유로파, 토성의 위성인 엔셀라두스 등 얼음 위성에서  MDA 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팀은 예상한다. 

목성이나 토성과 같은 거대 행성의 조석력이 위성의 얼음을 볼 밀링처럼 잘게 쪼개는 힘으로 작용해 위성 내부에 하얀 가루처럼 보이는 미세한  MDA 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니메데는 반지름이 2631㎞로 수성보다 크며 구성 물질 중 얼음 성분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위성이다.

한편 연구팀은  MDA 가 생성된 온도인  -200 ℃에서  -120 ℃까지 가열하는 실험도 진행했다. 

그 결과 무질서했던 물 분자가 다시 정렬된 결정 얼음으로 변해가면서 대량의 열을 방출했다. 

액체 상태의 물이 정상적으로 어는 경우보다 재결정할 때 훨씬 더 많은 열이 발생했다. 

연구팀은 만약 비슷한 변화가 가니메데 같은 위성에서 일어난다면 수 킬로미터 두께의 얼음이 움직이는 지각 운동과 얼음에서 일어나는 지진인 '빙진'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번  MDA  연구 결과에 대해 "액체 상태의 이산화규소( SiO ₂)가 그대로 굳어 창문용 유리가 되었듯,  MDA MDA는 액체 상태의 물이 고체로 정확히 복제된 것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특히 "인류가 지금까지 20종류의 결정 얼음과 2종류의 비정질 얼음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게 잘츠만 교수의 설명이다. 이번 발견을 계기로 연구팀은 우주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물이 어떤 구조인지 더 연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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